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문단 편집) ==== 내각 2기 ====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며 그 어떠한 정당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이어지자 결국 의회는 조기 해산을 결정하고 1998년에 새로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이 1998년 총선에서 또다시 인민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인도 인민당은 힌두주의와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정당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국민민주동맹(NDA)'를 결성한다. 바즈파이는 국민민주동맹을 기반으로 다시 총리직을 맡았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다르게 나름 탄탄한 의석수를 확보했고 의원들도 잘 관리하면서[* 이게 까다로웠던 이유는 타 군소 정당들이 인민당의 과격한 힌두 중심주의에 동조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탓이 크다.] 13개월 동안 연정을 이끌었다. 다만 1999년 중반에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연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연정이 붕괴해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를 포함한 야당 세력들 역시 독자적으로 연정을 구성할 의석수는 차지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의회가 해산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는 [[파키스탄]]과의 군사 충돌과 인도의 핵개발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1998년 5월에 [[라자스탄]] 주에서 1976년에 실시된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Smiling Buddha Project)' 이래 처음으로 5번에 걸친 핵실험이 이뤄졌고, 이에 격분한 [[파키스탄]]은 똑같이 핵실험을 감행하며 핵무기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했다. 한창 [[탈냉전]]으로 평화 무드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에 이짓거리를 저질렀으니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졌고 유럽,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인도에 기술, 정보 관련 제재를 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도는 약간의 경제적 타격을 입긴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내수 시장으로 잘 버텨냈고, 여론 역시 핵무기 보유에 압도적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인도는 끝끝내 핵무기 보유를 밀어붙여 결국 전세계의 묵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미국이 핵실험을 이유로 인도와 파키스탄에 부과한 제재도 몇 달 안가서 풀렸다.] 서로 핵무기를 쥐게 된 인도와 파키스탄은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덕에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99년 2월에 [[델리]]와 [[라호르]]를 잇는 버스 노선 개통과 함께 '라호르 선언'의 발표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경제 협력을 촉진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평화무드도 3달도 못가 박살나는 데 그 이유는 바로 '''[[카길 전쟁]]'''이 터졌기 때문. 카길 전쟁은 핵무기 보유국들 간에 일어난 최초의 전쟁으로, 1999년 5월에 파키스탄 군대가 카길 지방에 침투해 강제로 점유하면서 발발했다.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업고 함부로 세계가 개입하거나 인도를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파키스탄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격분한 인도 정부가 무려 3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해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고, [[중국]] 등 전통적인 우방국조차 명백한 침략국인 파키스탄을 외면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수세에 몰리고야 만 것. 결국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군대 철수를 지시했지만 이 사태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